하반기 경제성장전략, 3·4·5 비전은 숫자보다 경로가 문제다
정부가 2026년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을 발표하며 올해 성장률 전망을 3.0%로 끌어올리고, 잠재성장률 3%, 수출 4강, 국민소득 5만 달러라는 이른바 3·4·5 비전을 제시했다. 겉으로 보면 모처럼 나온 자신감 있는 성장 담론이다. 반도체와 AI 수요가 강하고, 수출과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정부가 대형 프로젝트에 재정과 제도를 집중하겠다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략을 좋은 뉴스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진짜 질문은 “목표가 크냐 작냐”가 아니라, 그 성장의 경로가 누구에게 도착하느냐다. 반도체가 좋아지고 데이터센터가 지어지고 수출 순위가 올라가도, 지역 상권과 청년 일자리, 중소기업 생산성, 가계의 생활비 부담이 나아지지 않으면 국민이 느끼는 회복은 제한적이다.
정부의 이번 전략은 숫자가 선명하다. 정책브리핑과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정부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를 3.0%로 제시했고, 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 3%, 전 세계 수출 4강,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반도체, AI, 에너지·인프라, 지역 거점과 연결된 대형 프로젝트를 정책의 중심에 놓는다. 정부가 말하는 방향은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과 인구구조 변화, 산업 경쟁 심화에 갇히지 않으려면 대형 성장동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대형 전략이 매번 “미래 먹거리”라는 이름으로 반복됐지만, 그 과실이 경제 전체로 넓게 퍼지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는 자주 실패했다는 점이다.

3·4·5 비전은 무엇을 말하는가
3·4·5 비전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다. 잠재성장률 3%는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을 다시 끌어올리겠다는 뜻이다. 수출 4강은 한국이 반도체, 방산, K콘텐츠, 뷰티, 푸드, 첨단 제조를 앞세워 세계 수출 상위권으로 올라서겠다는 의미다. 국민소득 5만 달러는 성장의 결과가 국민 생활 수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약속처럼 보인다. 세 숫자 모두 매력적이다. 정부가 경제의 방향을 제시할 때는 이렇게 기억하기 쉬운 목표가 필요하다.
그러나 숫자가 선명할수록 위험도 있다. 잠재성장률 3%는 말처럼 쉽게 올라가지 않는다. 잠재성장률은 단기 경기부양으로 오르는 숫자가 아니라, 노동력, 자본투자, 생산성, 교육, 기술혁신, 제도 효율이 함께 바뀌어야 올라간다. 수출 4강도 마찬가지다. 수출액이 늘어도 부가가치가 해외 부품과 장비, 에너지 수입으로 빠져나가면 국내 체감은 약해질 수 있다. 국민소득 5만 달러도 평균의 함정이 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도 소득분배가 나빠지고 주거비와 교육비가 더 빨리 오르면, 다수 국민에게는 풍요가 아니라 통계상의 상승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전략을 볼 때는 목표 숫자보다 경로를 봐야 한다. 정부는 어떤 산업에 돈과 규제를 풀 것인가. 그 산업의 고용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대기업 투자와 중소기업 납품망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줄어드는가. 전력과 물, 토지와 인력 같은 제약은 해결되는가. 이런 질문 없이 3·4·5만 반복하면 성장전략은 정책이 아니라 포스터가 된다.
반도체 호황은 기회이지만 착시도 만든다
이번 성장전략의 자신감은 상당 부분 반도체에서 나온다. AI 관련 수요가 강하고, 고부가 메모리와 서버 투자가 늘어나면 한국의 수출과 설비투자는 빠르게 좋아진다. KDI도 최근 경제동향에서 반도체 등 ICT 품목 중심의 수출 호조와 서비스업 개선을 언급했다. 이 흐름 자체는 분명 긍정적이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반도체가 살아나면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기업 실적과 투자 여력도 커진다.
하지만 반도체 호황은 착시도 만든다. 반도체는 수출과 성장률을 크게 움직이지만 고용 파급은 제한적일 수 있다. 첨단 공장은 자동화 비중이 높고, 고급 인력 중심으로 움직인다. 지역에 공장이 생긴다고 해서 지역 청년 다수가 바로 안정적 일자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반도체 투자는 전력, 용수, 부지, 인허가, 환경 갈등을 동반한다.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프로젝트를 크게 잡을수록, 그 프로젝트가 사용하는 자원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 따져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산업 집중이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에 기대어 회복할수록, 반도체 사이클이 꺾일 때 충격도 커진다. 지금은 AI 수요가 강하지만, 글로벌 공급이 늘고 가격이 조정되면 상황은 빠르게 달라질 수 있다. 수출과 성장률이 반도체 한 축에 과도하게 기대면 정부는 좋은 시기에는 낙관을 말하고, 나쁜 시기에는 외부 충격을 탓하게 된다. 성장전략은 호황을 즐기는 계획이 아니라 호황이 끝난 뒤에도 남을 구조를 만드는 계획이어야 한다.

3대 메가프로젝트의 핵심은 돈보다 병목이다
정부가 말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는 대형 투자를 통해 성장의 엔진을 만들겠다는 시도다. 이런 프로젝트에는 재정, 세제, 인허가, 금융, 인력양성, 규제 완화가 함께 들어간다. 그러나 대형 프로젝트의 성패는 돈을 얼마나 많이 넣느냐보다 병목을 얼마나 정확히 푸느냐에 달려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력과 물이 없으면 멈춘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망과 냉각, 부지, 지역 수용성이 없으면 지어도 갈등이 커진다. 방산과 첨단제조는 수출 허가, 공급망, 핵심 부품, 숙련 인력이 없으면 계획만 커진다.
대형 프로젝트는 정치적으로 매력적이다. 발표하기 쉽고, 지도에 표시하기 좋고, 투자 규모가 크다. 그러나 실제 실행은 훨씬 복잡하다. 지역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환경 부담은 싫어한다. 기업은 빠른 인허가를 원하지만 주민은 설명과 보상을 원한다. 중앙정부는 속도를 말하지만 지방정부는 기반시설과 재정 부담을 걱정한다. 이 조율이 안 되면 메가프로젝트는 성장전략이 아니라 갈등 프로젝트가 된다.
특히 전력 문제가 중요하다. AI와 반도체는 막대한 전기를 쓴다. 데이터센터와 첨단 공장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사업이 아니라 전력망을 새로 짜는 사업에 가깝다. 정부가 모든 발전원을 동원해 전력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해도, 송전망 건설과 지역 수용성, 에너지 가격, 탄소중립 목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값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지 못하면 첨단산업 경쟁력은 약해진다. 반대로 전력 비용을 사회 전체가 떠안으면 국민은 전기요금과 환경 부담으로 비용을 치른다. 이 부분을 빼고 성장전략을 말하면 절반만 말하는 것이다.
수출 4강이 국민 생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수출 4강이라는 목표도 따져봐야 한다. 한국은 이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다. 수출이 늘면 성장률과 기업 실적은 좋아진다. 하지만 수출이 국민 생활을 자동으로 개선하지는 않는다. 수출 대기업의 이익이 협력업체 단가, 노동자 임금, 지역 소비, 세수, 연구개발 투자로 이어져야 한다. 이 경로가 막히면 수출은 좋아졌는데 내수는 답답한 상태가 계속된다.
최근 한국 경제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 바로 이 괴리다. 주가지수와 수출 지표는 좋아지는데, 자영업자는 손님이 줄었다고 말하고, 청년은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말하며, 중소기업은 원가와 인력난을 호소한다. 이는 단순한 심리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 경로가 좁기 때문이다. 특정 대기업과 특정 품목, 특정 지역에 성장이 집중되면 평균은 좋아져도 다수의 체감은 약하다. 정부가 말하는 국민소득 5만 달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 경로를 넓혀야 한다.
수출 4강을 목표로 할수록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 문제를 더 세게 다뤄야 한다. 한국의 많은 일자리는 제조 대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과 중소기업에 있다. 이 부문이 낮은 생산성에 머물면 수출 대기업이 벌어온 돈이 경제 전체의 임금과 생활 수준으로 퍼지기 어렵다. 정부가 소상공인 생산성 제고, 유통구조 개선, 서민 생계비 경감을 말한 것은 방향상 맞다. 다만 문제는 실행이다. 매년 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실제 수수료와 임대료, 교육훈련, 디지털 전환, 금융비용을 얼마나 바꾸는지가 중요하다.

지역 성장 전략은 지방에 공장 하나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부는 지방과 지역 거점을 성장전략의 한 축으로 강조한다.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수도권 집중이 계속되면 주거비는 오르고, 지방은 인구와 일자리를 잃고, 국가 전체의 생산성도 떨어진다. 그러나 지역 성장 전략은 지방에 산업단지나 공장을 하나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 대학, 직업교육, 주거, 교통, 의료, 문화, 돌봄이 함께 있어야 사람이 남는다. 기업만 내려가고 사람이 떠나면 지역 전략은 껍데기가 된다.
청년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에 일자리가 있다”가 아니라 “그 일자리가 내 삶을 설계할 만큼 안정적이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가”다. 지역에 단기 건설 일자리만 생기고, 고급 연구개발과 의사결정은 수도권에 남아 있으면 청년은 결국 수도권으로 간다. 지역 성장전략이 성공하려면 기업의 생산기능뿐 아니라 연구, 설계, 데이터, 금융, 문화 기능까지 일부 내려가야 한다. 이건 쉽지 않다. 정부가 인센티브만 준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조직 구조와 인재 이동 방식을 바꿔야 하는 문제다.
지역 주민의 수용성도 중요하다. 대형 프로젝트가 지역에 들어오면 고용 기대와 함께 교통, 환경, 부동산, 생활비 부담이 생긴다. 외부 인력이 들어와 집값과 임대료를 올리고, 지역 상권은 일부만 혜택을 볼 수도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주민에게 장밋빛 전망만 말하면 갈등은 나중에 터진다. 지역 전략은 보상, 참여, 환경 관리, 지역업체 참여 비율, 교육 연계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
재정 투입은 선택과 집중이어야 한다
정부가 성장전략을 추진하려면 재정이 들어간다. 세제 혜택, 보조금, 정책금융, 기반시설, 연구개발, 인력양성 모두 돈이 든다. 문제는 재정 여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은 저출산·고령화로 복지 지출이 늘고, 금리와 국채 이자 부담도 무시하기 어렵다. 이 상황에서 대형 성장 프로젝트에 돈을 쓰려면 왜 그 돈이 다른 지출보다 더 큰 사회적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재정 투입의 가장 나쁜 방식은 큰 기업이 어차피 할 투자를 정부가 보조하는 것이다. 기업이 이미 필요해서 투자할 곳에 세금이 들어가면, 국민은 기업의 비용을 대신 내준 셈이 된다. 반대로 정부 돈이 정말 필요한 곳은 민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기반시설, 기초 연구, 인력양성, 지역 전환, 중소기업 기술 확산이다. 성장전략의 품질은 누구에게 얼마를 주느냐보다,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병목에 정확히 쓰느냐에서 결정된다.
성과 관리도 필요하다. 정부가 메가프로젝트에 재정을 우선 투입한다면, 프로젝트별 고용, 투자, 수출, 지역 기여, 중소기업 참여, 탄소배출, 전력 사용, 생산성 개선 지표를 공개해야 한다. 단순히 “투자 규모가 크다”는 말은 성과가 아니다. 투자 규모는 비용이기도 하다. 국민이 봐야 할 것은 투자가 아니라 결과다. 정부가 성과 지표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성장전략은 정책 평가가 아니라 홍보 자료로 남는다.
낙관적 전망의 위험
정부가 올해 성장률 전망을 3.0%로 제시한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일부 보도에서 지적하듯 이는 한국은행과 IMF 등 다른 전망보다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전망이 높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정부는 정책 의지를 반영해 도전적 목표를 제시할 수 있다. 문제는 도전적 전망이 정책 실패를 가리는 낙관론으로 쓰일 때다. 성장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제 아래 재정과 규제를 설계했다가, 환율과 국제유가, 통상 갈등, 반도체 사이클이 예상과 달라지면 정책은 흔들린다.
특히 중동 리스크와 에너지 가격, 미국 통상정책, 글로벌 AI 투자 사이클, 중국 경기, 환율은 한국이 통제하기 어렵다. 수출 중심 성장전략은 외부 변수에 민감하다. 정부가 성장률 3.0%를 말할수록, 동시에 하방 리스크도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적 숫자만이 아니라, 숫자가 틀렸을 때 어떤 안전장치가 있는지다. 성장전략은 낙관의 문서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문서여야 한다.
내 판단: 방향은 맞지만, 과실의 경로가 약하다
내 판단은 이렇다. 정부가 반도체, AI, 첨단산업, 지역 거점, 수출 전략을 성장의 중심에 놓은 방향은 틀리지 않다. 한국이 저성장에 갇히지 않으려면 기술과 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복지와 분배도 결국 성장의 기반 없이 지속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은 필요한 문서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연결 구조다. 반도체와 AI의 성장 온기가 중소기업과 지역, 서비스업, 청년 일자리, 가계 소득으로 번지는 경로가 아직 충분히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정말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면, 대형 프로젝트의 이름보다 확산 장치를 더 강조해야 한다. 협력업체 기술 지원, 납품단가 공정화, 지역 대학과 기업의 공동 교육,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 서비스업 생산성, 주거비와 교통비 완화, 전력망과 에너지 비용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으면 3대 메가프로젝트는 대기업 투자 지도에 머물고, 3·4·5 비전은 평균 숫자의 개선으로 끝날 수 있다.
독자가 봐야 할 체크포인트는 분명하다. 첫째, 정부의 성장률 3.0% 전망이 실제 분기 지표로 확인되는지 봐야 한다. 둘째, 반도체 수출 호조가 고용과 임금, 중소기업 매출로 이어지는지 봐야 한다. 셋째,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의 전력·용수·주민 수용성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봐야 한다. 넷째, 지역 전략이 단순 공장 유치인지, 대학·주거·교통·의료와 연결된 생활권 전략인지 봐야 한다. 다섯째, 재정 투입의 성과 지표가 공개되는지 봐야 한다. 이 다섯 가지가 약하면 성장전략은 큰 목표에도 불구하고 체감경기로 번지기 어렵다.
결국 이번 전략의 성패는 3·4·5라는 숫자가 아니라 “확산”에 달려 있다. 수출이 늘고 대기업 투자가 커지고 성장률이 올라가는 것은 출발점이다. 그 다음에는 돈과 기회가 어디로 흐르는지 봐야 한다. 성장의 중심이 좁으면 나라는 커 보이지만 국민은 답답하다. 성장의 경로가 넓으면 숫자가 조금 덜 화려해도 삶은 나아진다. 정부가 앞으로 증명해야 할 것은 비전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전이 보통 사람의 일자리와 생활비, 지역의 미래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성장전략이 실패하는 익숙한 방식
한국의 성장전략이 실패할 때는 대개 비슷한 모양을 보인다. 발표 당시에는 투자 규모가 크고, 산업 이름이 새롭고, 목표 숫자가 높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인허가가 늦어지고, 전력망과 부지 갈등이 생기고, 지역 인력은 부족하고, 중소기업은 프로젝트의 주변부에 머문다. 대기업은 투자를 하지만, 협력업체는 낮은 단가와 인력난을 그대로 안는다. 정부는 “생태계”를 말하지만 실제 생태계는 몇몇 대기업과 공공기관, 일부 연구기관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 패턴을 끊지 못하면 이번 전략도 이름만 다른 반복이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수효과를 자동으로 가정하지 않는 일이다. 첨단산업 대기업이 성장한다고 해서 임금과 기술, 일자리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협력업체가 기술 개발에 참여하고, 납품단가가 공정하게 조정되고, 인력 양성이 현장과 연결되고, 지역 대학과 기업이 함께 교육과 채용을 설계해야 확산이 일어난다. 이것은 시장이 알아서 해주는 일이 아니다. 정부가 성장전략을 말한다면 바로 이 연결장치를 정책의 본문으로 써야 한다.
또 하나의 실패 방식은 규제 완화를 만능열쇠처럼 쓰는 것이다. 인허가가 느리고 불필요한 규제가 있다면 당연히 줄여야 한다. 하지만 모든 갈등을 규제 탓으로 돌리면 위험하다. 환경 규제, 안전 규제, 주민 의견 수렴, 노동 기준은 불편하지만 필요한 장치일 수 있다. 속도만 앞세우다 사고가 나거나 지역 갈등이 커지면 프로젝트는 더 늦어진다. 좋은 성장전략은 규제를 없애는 전략이 아니라, 필요한 규제와 불필요한 규제를 구분하는 전략이다.
청년 일자리로 이어지는가
이번 전략을 평가할 때 청년 일자리는 핵심 지표가 되어야 한다. 청년들은 성장률보다 내가 들어갈 좋은 일자리가 있는지를 본다. 반도체와 AI 투자가 늘어도 채용이 일부 고급 인력에 집중되고, 나머지 청년은 계약직과 하청, 플랫폼 노동으로 밀리면 성장전략의 설득력은 약해진다. 정부가 인력양성을 말한다면 단순 교육 과정 숫자가 아니라, 교육 이수자의 실제 취업률과 임금, 경력 지속성을 공개해야 한다.
특히 AI와 첨단산업은 일자리의 양보다 질을 먼저 바꾼다. 기존 사무직과 서비스직 일부는 자동화 압박을 받고, 고급 개발자와 엔지니어 수요는 늘어난다. 이때 교육 격차가 크면 성장전략은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 이미 좋은 학교와 자원을 가진 사람은 더 좋은 일자리로 이동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낮은 임금의 대체 가능한 일자리에 머문다. 성장전략이 사회 전체를 설득하려면 전환 교육과 직업훈련, 지역 청년의 접근성을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산업 이름이 아니라 경로다. 어느 지역 대학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기업에 인턴으로 들어가고, 어떤 임금과 경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정부가 “AI 인재 몇 명 양성”이라고 발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청년 입장에서는 그 교육이 실제 채용으로 이어지는지, 수도권에 가지 않아도 기회가 있는지, 중소기업에 가도 경력 가치가 쌓이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성장전략은 청년에게 멀게 느껴진다.
중소기업이 기술 전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약한 고리는 중소기업 생산성이다. 대기업의 기술 수준은 세계적이지만, 많은 중소기업은 인력과 자본, 데이터, 자동화 역량이 부족하다. 성장전략이 대기업 중심 프로젝트로만 흘러가면 중소기업은 납품 부담만 지고 생산성 개선은 뒤처진다. 그러면 임금격차와 고용의 질 문제가 계속된다. 정부가 진짜 성장률을 올리고 싶다면 중소기업이 AI와 자동화, 데이터 활용을 실제 업무에 넣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필요한 정책은 추상적인 디지털 전환 구호가 아니다. 중소기업이 쓸 수 있는 표준 소프트웨어, 공동 데이터 인프라, 현장 컨설팅, 설비 투자 금융, 숙련 인력 매칭, 납품단가와 기술탈취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기술을 도입해도 원청이 단가를 낮춰버리면 투자 유인이 사라진다.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원청과 협력업체, 노동자에게 어떻게 배분되는지까지 봐야 한다.
또한 소상공인과 서비스업도 성장전략의 바깥에 두면 안 된다. 국민이 체감하는 일자리와 물가는 서비스업에서 많이 결정된다. 음식점, 숙박, 돌봄, 교육, 운송, 수리, 유통의 생산성이 낮으면 임금은 낮고 가격은 높아지기 쉽다. 정부가 대형 프로젝트에 집중하더라도, 서비스업 생산성을 높이는 작은 정책을 꾸준히 해야 한다. 예약·결제·재고·회계 시스템, 공동 물류, 에너지 효율, 직업훈련, 수수료 구조 개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장전략의 품질은 거대한 공장뿐 아니라 동네 가게의 비용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국민소득 5만 달러의 불편한 조건
국민소득 5만 달러는 듣기 좋은 목표다. 그러나 이 목표가 의미 있으려면 평균 소득만이 아니라 생활비와 분배를 함께 봐야 한다.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집값과 월세, 사교육비, 의료비, 노후비용이 더 빨리 오르면 국민은 부자가 되었다고 느끼지 못한다. 소득의 평균이 올라가도 중위소득이 충분히 따라오지 못하면 다수의 삶은 그대로다. 정부가 5만 달러를 말할수록, 소득의 분포와 생활비 구조를 같이 설명해야 한다.
국민소득 목표에는 환율 변수도 있다. 달러 기준 국민소득은 원화 가치와도 연결된다. 원화가 약하면 달러 기준 소득은 낮아지고, 환율이 안정되면 숫자가 좋아질 수 있다. 따라서 5만 달러 목표는 단순히 국내 생산을 늘리는 문제만이 아니라 환율 안정, 대외 신뢰, 금융시장 안정과도 연결된다. 최근 한국 경제가 경험한 고환율 부담을 생각하면, 국민소득 목표를 말할 때 환율과 물가를 빼놓을 수 없다.
결국 국민소득 5만 달러가 정치적 슬로건이 되지 않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성장의 과실이 중위소득과 저소득층 소득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둘째, 주거와 교육, 의료, 돌봄 비용이 통제되어야 한다. 셋째, 환율과 물가가 안정되어야 한다. 이 조건 없이 평균 소득만 높아지면 국민은 통계를 믿지 않게 된다. 경제정책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정부가 좋아졌다고 말하는데 국민이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때다.